[ITTF 선정 역대 올림픽 남자 단식 스릴러] 2000년 시드니 올림픽 남자 결승전. 공링후이 VS 발트너.
작성자 이옥수(빠빠빠)
등록일2020-09-07 07:46:02
조회2,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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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공링후이(Kong Linghui)는 중국이 셰이크핸드 시대를 맞아 스웨덴으로 탁구 유학을 보내 전략적으로 키운 선수입니다. 공링후이는 1993년 탁구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이후, 처음 출전한 1995년 톈진(Tianjin) 세계탁구선수권대회에서 19살(1975년 10월 18일생)에 곧바로 세계 챔피언에 올랐고, 그해 님스(NImes) 남자 탁구 월드컵까지 우승했습니다. 1996년 1월에는 세계 1위까지 올랐습니다. 

 

중국은 1995년 톈진 대회에서 공링후이, 류궈량(Liu Guoliang), 왕타오(Wang Tao) 등을 앞세워 전 종목 스윕에 성공했습니다. 1981년 노비사드(Novisad) 대회 이후 14년 만의 대기록 달성이었습니다. 이후, 중국 남자 탁구는 왕리친(Wang Liqin), 마린(Ma Lin), 왕하오(Wang Hao) 등이 차례로 데뷔하며 본격적인 중국 탁구 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1995년 톈진 세계탁구선수권대회 남자 개인단식 결승전 공링후이 VS 류궈량)

(출처 : 유튜브)

 

당연히, 공링후이의 다음 목표는 올림픽 금메달이었습니다. 중국은 1988년 서울(Seoul) 올림픽에서 탁구가 정식 정목으로 채택된 이후, 남자 개인단식에서 금메달을 따지 못했습니다. 1988년 서울 올림픽은 한국 유남규(Yoo Namkyu), 1992년 바르셀로나(Barcelona) 올림픽은 스웨덴 얀-오베 발트너(Jan-Ove Waldner)가 금메달을 따냈습니다. 공링후이는 중국 남자 사상 첫 올림픽 개인단식 금메달리스트가 될 것으로 기대를 모았습니다. 하지만, 첫 출전 대회인 1996년 애틀랜타(Atlanta) 올림픽에서 본선 1라운드 탈락이라는 기대 이하의 성적을 기록하고 말았습니다. 공링후이는 A 그룹 1위로 본선에 올랐지만, 본선 1라운드 16강 첫 경기에서 한국 김택수(Kim Taeksoo)에 1-3(21-17, 21-18, 20-22, 21-12)으로 패했습니다.

 

1996년 애틀란타 올림픽에서 중국 남자 사상 첫 개인단식 금메달리스트가 된 선수는 바로 중국 류궈량이었습니다. 류궈량은 4강에서 독일 외르그 로스코프(요크 오스콥트) 3-1(17-21, 21-18, 18-21, 18-21), 결승에서 중국 왕타오(Wang Tao)를 3-2(21-12, 22-24, 21-19, 15-21, 21-6)를 꺾고 최종 금메달을 목에 걸었습니다. 이후, 류궈량은 1997년 님스(Nimes) 남자 월드컵, 1999년 에인트호번(Enindhoven) 세계 대회에서 차례로 우승하며 역대 2번째, 중국 남자 사상 첫 탁구 그랜드슬램에 성공했습니다.

 

그랜드슬램 경쟁에서 먼저 앞서나간 쪽은 공링후이였지만, 1996년 애틀란타 올림픽 부진으로 중국 남자 사상 최초 타이틀은 류궈량이 먼저 달성했습니다.

 

 

2000년 시드니 올림픽 금메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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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ITTF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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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링후이 2000년 시드니 올림픽 남자 개인단식 경기 결과)

 

2000년 시드니 올림픽부터 경기 방식이 조금 바뀌어 개인단식 본선 1라운드는 32강부터 시작되었고, 세계 랭킹 상위 16명의 선수들은 시드를 받아 본선에 직행했습니다.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은 본선 1라운드가 16강부터 시작되었고, 시드없이 총 16개 그룹에서 1위에 오른 선수들이 본선에 올랐습니다. 중국은 총 3명(공링후이/1번, 류궈량/3번, 류궈정/10번)의 선수가 3명 모두 본선 시드를 받았습니다. 참고로, 한국은 총 3명(김택수, 이철승, 유승민)의 선수가 출전해 김택수만이 9번 시드를 받아 본선에 직행했고, 이철승(Lee Chulseung), 유승민(Ryu Seungmin)은 그룹별 예선을 통과해 본선에 올랐습니다.

 

당시, 공링후이의 나이(24살)와 중국 영건(왕리친, 마린, 왕하오)들의 성장 속도 등을 감안하면, 공링후이의 다음 올림픽 출전은 기약하기 힘든 상황이었습니다. 공링후이에게 2000년 시드니 올림픽 마지막 기회와도 같은 대회였고, 그만큼 경기 내용 역시 대단한 접전이었습니다. 공링후이는 16강(루치안 블라스치크), 8강(베르너 슐라거)에서 3 대 2 접전을 펼쳤고, 4강에서 스웨덴 요르겐 페르손을 3-1(21-12, 13-21, 21-16, 21-13)로 꺾고 결승에 올랐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결승 상대는 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챔피언이자, 세계 최초 남자 그랜드슬램에 성공한 스웨덴 얀-오베 발트너였습니다.

 

얀-오베 발트너 역시 4년 전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에서 캐나다 쟈니 황(Jonny Huang)에 패해 본선 1라운드 16강 탈락이라는 기대 이하의 성적을 기록했지만, 2000년 시드니 올림픽에서 결승 진출에 성공하며 건재함을 과시했습니다. 얀-오베 발트너는 8강에서 벨라루스 블라디미르 삼소노프(Vladimir Samsonov) 3-2(20-22, 18-21, 21-14, 21-18, 21-19), 4강에서 디펜딩 챔피언 중국 류궈량을 3-0(19-21, 16-21, 19-21)으로 꺾고 결승에 올랐습니다.

 

(2000년 시드니 올림픽 남자 개인단식 결승전 공링후이 VS 얀-오베 발트너)

(출처 : 유튜브)

(▲ 올림픽 경기는 저작권이 있어 재생이 차단됩니다. 유튜브로 이동해서 보세요)

 

마지막 결승전은 공링후이가 1, 2게임을 먼저 따내며 먼저 앞서갔지만, 이후  얀-오베 발트너가 3, 4게임을 따내며 승부는 마지막 5게임으로 넘어갔습니다. 흐름상으로 공링후이에게 매우 불리해진 상황이었지만, 공링후이는 5게임이 시작되고 최고 9점 차 10-1까지 앞서 나가며 초반에 완전히 승기를 잡았습니다. 얀-오베 발트너는 게임 초반 범실이 쏟아지며 큰 차이로 뒤지고 말았습니다. 이후, 얀-오베 발트너는 볼 컨트롤이 살아나며 12-15 3점 차까지 추격했지만, 초반 격차를 줄이기엔 역부족이었습니다. 결국, 공링후이는 5게임을 21-13으로 따내며 최종 금메달을 목에 걸었습니다. 

 

공링후이 - "예전에 발트너와 경기할 때, 나는 항상 그의 박자를 쫓아야 했다. 그가 박자를 바꾸면, 나도 따라 바꾸어야 했고, 항상 소극적인 느낌이었다. 그래서, 나는 이 점을 코치와 분석했고, 발트너같이 변화에 능숙한 선수와 경기할 때 가장 좋은 방법은 그가 변화를 준다고 해서 나까지 변해서는 안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는 그의 박자대로, 나는 나의 박자대로 플레이했다. 전술적으로 아주 단순했다. 서비스를 넣은 다음, 2, 3번 변화를 주고, 랠리에 들어갔다. 랠리 중에는, 발트너가 중앙에 서 있어 어떤 것도 시도할 수 없을 때까지 포핸드 방향을 공략하기 위해 애썼다. 그래서, 나는 이겼다. 물론, 이 전략은 내가 발트너보다 랠리가 좋았기 때문에 쓸 수 있었고, 일반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전략은 아니다" (출처 : 미상)

 

공링후이는 1995년 톈진 세계 대회 우승 이후, 1995년 님스 남자 탁구 월드컵, 2000년 시드니 올림픽에서 우승하며 스웨덴 얀-오베 발트너, 중국 류궈량에 이어 역대 3번째 탁구 그랜드슬램에 성공했습니다. 공링후이는 류궈량보다 세계 대회, 탁구 월드컵 우승은 빨랐지만, 올림픽 우승이 4년 늦었습니다.

 

이 밖에 공링후이는 1996년 제1회 톈진 그랜드 파이널스 결승에서 벨라루스의 블라디미르 삼소노프를 꺾고 우승하며 남자 사상 첫 탁구 4대 메이저 대회 우승에 성공했습니다. 얀-오베 발트너, 류궈량 모두 그랜드 파이널스 우승은 하지 못했습니다. 두 선수 중에 류궈량은 1998년 파리(Paris) 대회에서 준우승, 얀-오베 발트너는 같은 대회에서 3위에 오른 게 역대 최고 성적이었습니다.

 

 

 

(출처 : 빠빠빠  탁구클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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