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미리 시대 첫 세계 챔피언. 2001년 오사카 세계 챔피언 왕리친(Wang Liqin).
작성자 이옥수(빠빠빠)
등록일2020-05-05 08:0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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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구는 2000년을 기점으로 2가지 큰 변화를 맞이하게 됩니다. 첫째 셀룰로이드(Celluloid) 볼의 지름이 기존 38미리에서 2미리 더 커진 40미리로 바뀌었고, 둘째 점수제가 기존 21포인트 5전 3선승제에서 11포인트 7전 4선승제로 바뀌었습니다. 40미리 볼은 2000년 시드니(Sydney) 올림픽이 끝나고, 그 해 10월 양저우(Yangzhou) 남자 탁구 월드컵부터 곧바로 적용되었고, 점수제는 그보다 1년이 더 늦은 2001년 9월부터 전격 시행되었습니다. 2001년 오사카(Osaka) 세계탁구선수권대회는 볼은 새로 바뀐 40미리 볼을 사용했지만, 점수제는 기존 방식 그대로 21포인트 5전 3선승제가 적용되었습니다. 2001년 오사카 대회는 개인전(남녀 개인단식, 남녀 개인복식, 혼합복식), 단체전에 한 번에 치러진 마지막 대회였을 뿐만 아니라, 21포인트 5전 3선승제로 치러진 마지막 세계 대회였습니다.

 

세계 최강 중국 대표 팀은 2001년 오사카 대회에서 7개 전 종목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중국은 자국에서 개최된 1995년 톈진(Tianjin) 대회 이후 6년 만에 다시 전 종목 우승에 성공했습니다. 1995년 톈진 대회에서 중국의 전 종목 우승을 이끈 선수가 남자 2관왕(단체전, 개인단식) 공링후이(Kong Linghui)와 여자 3관왕(단체전, 개인단식, 개인복식) 덩야핑(Deng Yaping)이었다면, 2001년 오사카 대회는 남자 3관왕 왕리친(Wang Liqin)과 여자 3관왕 왕난(Wang Nan.王楠) 이었습니다. 두 선수는 똑같이 혼합복식을 제외한 단체전, 개인복식, 개인단식에서 차례로 우승하며 세계 대회 금메달 3개를 목에 걸었습니다.

 

특히, 왕난은 1999년 에인트호번(Eindhoven) 대회에 이어, 2회 연속 세계 챔피언에 올랐습니다. 왕난은 2회 연속 세계 챔피언 등극과 함께, 38미리 시대와 40미리 시대를 제패한 유일한 선수였습니다. 이후, 왕난은 다음 대회인 2003년 파리(Paris) 대회 역시 우승을 차지하며 3회 연속 세계 챔피언에 올랐을 뿐만 아니라, 11포인트 7전 4선승제가 적용된 첫 세계 대회에서 챔피언에 올랐습니다.

 

이와 같이, 여자는 왕난이 볼 크기 변화에 상관없이 2회 연속 챔피언에 올랐지만, 남자는 당시 22살(1978년 6월 18일 생)의 영건 왕리친이 40미리 시대 사상 첫 챔피언에 올랐습니다. 왕리친은 4강에서 창펭룽을 3-0(21-13, 24-22, 21-14), 2000년 시드니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이자, 탁구 그랜드슬램 달성자 공링후이를 접전 끝에 3-2(11-21, 11-21, 21-16, 21-13, 21-13)로 꺾고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공링후이는 4강에서 마린(Ma Lin)을 3-1(21-14, 17-21, 13-21, 15-21)로 꺾고 결승에 올라 역대 2번째 세계 챔피언에 도전했지만, 왕리친에 패해 준우승에 만족했습니다.

 

 

1999년 오사카 대회 세계 챔피언 왕리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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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시나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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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오사카 세계탁구선수권대회 남자 개인단식)

 

(2001년 오사카 세계탁구선수권대회 남자 개인단식 결승전 왕리친 VS 공링후이)

(출처 : 유튜브)

 

왕리친과 공링후이의 결승전은 2게임까지만 해도 공링후이의 완승 흐름이었습니다. 공링후이는 1, 2게임 모두 21-11로 따내며 게임 스코어 2-0으로 앞서 나갔습니다. 당시, 전문가들의 평가대로 공링후이는 완벽에 가까운 양핸드 드라이브를 앞세워 왕리친을 압도했습니다. 왕리친이 포핸드로 선제라도 잡으려 하면, 공링후이는 왕리친의 포핸드 깊은 쪽을 공략해 포인트를 쌓아나갔습니다. 분명, 2게임까지만 해도 왕리친이 할 게 없는 경기였지만, 3게임부터 흐름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왕리친은 전략을 바꿔 공링후이의 포핸드 쪽을 공략하기 시작했고, 여기에 끈질긴 수비 능력까지 더해져 앞서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왕리친은 3게임을 21-16으로 따내며 분위기 반전에 성공했고, 4, 5게임 모두 21-13으로 따내며 최종 우승을 결정지었습니다. 

 

 

왕리친의 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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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시나닷컴)

 

왕리친은 우승이 확정되고, 벤치로 돌아와 수건에 얼굴을 파묻고 기쁨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왕리친은 내성적인 성격에 큰 대회를 앞두고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선수였습니다. 적당한 스트레스는 긴장감을 높이는 순기능이 있지만, 왕리친은 스트레스 때문에 경기에 출전하지 못하고, 예상치 못한 선수에게 패하는 경우가 잦았습니다. 왕리친은 가진 재능이 워낙 뛰어나 이미 1999년 에인트호번 대회에서 첫 우승의 기대를 모았지만, 32강에서 데미앙 엘루아에 패했습니다. 그리고, 첫 올림픽인 2000년 시드니 올림픽에서는 개인단식은 출전하지 못하고, 얀센(Yan Sen)과 함께 개인복식에만 출전했습니다. 다행히, 왕리친은 시드니 올림픽 남자 개인복식 결승에서 금메달 복식조 공링후이, 류궈량(Liu Guoliang)을 3-1(20-22, 21-17, 19-21, 18-21)로 꺾고 금메달을 따냈지만, 개인단식에 출전하지 못한 것은 큰 아쉬움으로 남았습니다.

 

왕리친 - "가끔 나는 경기에서 그립을 제대로 잡지 못할 때가 있다. 이것은 나의 최고 약점이 되었다. 경기 중이나 훈련 중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출처 : CCTV)

 

2001년 오사카 대회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중국은 한국과 경기한 남자 단체전 4강부터 왕리친을 빼고, 공링후이, 류궈정(Liu Guozheng), 마린(Ma Lin)을 주전으로 출전시켰습니다. 중국은 독일과의 8강전 2매치에서 왕리친이 티모 볼에 0-2(19-21, 20-22)로 패한 이후, 세계 1위 선수를 단체전에서 아예 제외시켜버렸습니다. 하지만, 이후 왕리친은 개인복식(얀센)과 개인단식에 차례로 출전해 컨디션을 되찾았고, 두 종목 모두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마지막 개인단식에서 우승하며 세계 챔피언에 오른 후에는 결국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습니다.

 

 

 

(출처 : 빠빠빠 탁구클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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